우리 청사를 짓고

올 1월부터 10월까지 우리가 업무할 청사건축업무를 맡았다.
내년에는 본관을 개보수하여야 하기에 시름을 놓을 형편은 아니다.
올 같이 무더운 여름에 대역사를 만든 많은 참여 인부들에게, 그리고 공정마다 발주청의 말 같지 않는 주문을 참아주신 기술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용접연기와 돌 자르는 먼지, 뙤약볕, 긴 하루, 여름작업은 얼마나 고통인가
엘리베이터 같이 닫힌 공간에서는 서로의 땀냄새로 아예 코를 막고 가야한다.
개인적으로 시설업무를 달가워 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재직중에 우리 공간내 발생한 대형공사는 도맡아 한다는 자부심이 나름은 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었다. 부딪히는 장벽과 갈등도 많았다.  기술자이면서 기술자보다도 못한 소리를 해대는 넘도 있고, 의사결정을 신속히 못해서 안달할 때도 있었다. 뻔한 내용을 두고 삥삥 둘러 다니고 책임회피하고
하여튼 준공은 되고 입주를 하고
입주하고 나서 공사가 진행될 때보다 더 빠빴다면 이해가 될지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후 집에 가서 신발을 벗으면 양말이 붙어 있었다. 땀에 범벅이 되서 악취가 진동을 한다.
업무공간에 전등을 조금 본다고 발을 벗고 책상에 올라 갔다가 냄새 때문에 너무 미안해서 퇴근하고 고쳐 주겠다고 돌아왔을 지경이다. 그리고, 어쩜 직원들이 그렇게 야속한지  
모든 것이 시공했던 우리네 과실일 따름이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막사용으로 인한 파손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리고 시건장치(실런더록)는 얼마나 고통이던가. 새벽도 밤도 가리지 않고 울려 되던 휴대폰이 질리게 하였다.
직원들이 새 실린더 록에 익숙치 않아서 발생되는 숱한 사연들 어떤 문은 동일한 사유로 5번이나 왕복을 했다.

이 공사를 하면서
만평이 넘는 큰 청사를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100%를 만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99%를 하였다. 언제고 내가 못한 1% 때문에 후회할 날도 있으리라고 했었는데 입주도 하기 전에 바로 후회할 일이 발생되었다.  윗사람을 설득하지 못한 후회, 그래도 한 번더 설득해 볼 것을 
그리고 올 여름은 어떻게 지낼건가.
 

by 추종자똘만이 | 2010/12/06 13:19 | 자칭 대목장으로 | 트랙백 | 덧글(0)

언어는 어떻게 변천할까요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다.
글를 이루는 자음과 모음 그리고 자음과 같은 받침을 갖고 있으며, 간단한
문장체계만 익히면 얼마든지 글을 사용할 수 있다.
알파벳처럼 대문자 소문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어처럼 많은 자음과 모음들로 구성되지도 않으면서
세상에서 나는 모든 소리들을 소리값대로 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언어를 이야기 할때 사람과 사람과의 의사전달을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말과,  인간의 발성기관을 통해 나오는 말과 자연에서 나는 소리들을 종이 등 기록매체에 기록하는 기호인 글(문자) 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말과 글은  다같이 사회적인 약속이랄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소리나는 사물이나 물체는 소리를 특정하여 어떻게 부르고 이를 글로는 이렇게 표현하자
그리고 생김새에 따라, 어떤 장소에 있으냐, 어떤 시간에 있느냐 등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특정하여 사물의 이름을 정하고 그렇게 계속하여 부르게 되는 사회적인 약속이다.

말이 자연적으로 생겨나게 된 것이 유사 이전이니 아마도 말은 지역적인 공동체 집단 또는 혈연적인 공동체 집단에서 이와 같은 사회적인 약속(법이나 규범이 아닌 자연발생적인 약속)을 하고 사용하게 되었고(이는 유인원의 세계나 동물들의 의사소통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본 학자들은 어떤 상황에 따라 울부짖거나 하는 행동들을 달리 한다고 한다. 동물들이 하는 기본적인 행동이나 울부짖음 등이 아주 원시적인 말이며 의사소통의 수단인 것임), 인간의 생활패턴이 수렵채취의 생활방식에서 농업이나 목축으로 첨차 바꾸는 시대가 오기 전에 수렵방식의 개선이나 채취방식의 개선 등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먹거리의 생산과 분배, 욕구불만의 해소 등 인지능력의 개선에 따라 많은 말(사회적 약속)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간의 삶에서 맨처음 부딫히게 되는 먹거리에 대한 이름부터 해, 달, 별, 나무 풀, 등 사물의 이름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내 먹거리를 뺏어 먹는 힘센 넘과, 내가 뺏을 수 있는 힘 없는 넘의 이름까지, 그리고 갓난 애기와 남과 여, 청년, 늙은 사람 등등.

인간이 공간적인 제약과 시간적인 제약을 극복할 필요성이 없는 순간까지는 아무 불편없이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동일 공동체 안에서는 어순체계도 동일하고, 사물의 이름도 같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말과 소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되므로, 즉 소리가 나는 순간에만 들을 수 있는 시간상의 제약,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공간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공간상의 제약이 있으므로 이를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공간상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글이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시간상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시간상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사실의 기록(부족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록일 수도 있고, 먹거리가 생산되는 장소를 표시하는 기록, 위험표시, 의식의 순서  등) 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초기의 글은 일상생활에 접하는 사물들의 모양들을 본따서 만들 수 밖에 없을 것이나, 점차 간편하고 신속하게 구현할 수 있는 기호들로 바뀌어 갈 것이다. 그러나 어순의 체계는 웬만한 사회적인 변화가 온다고 하여도 동일 공동체 안에서 쉽게 바뀔 수 없다. 사물의 이름값은 얼마든지 바뀔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흔히 한자어로 된 단어들 즉 "산", "강"의 말은 한글에서 "뫼"와 "가람"의 이름값에서 바뀐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사물의 이름값이 쉽게 변하는 상황을 보아 왔다.  그러나 어순은 바뀔 수 없다.

새가 난다라는 문장을
우리글의 표현대로 한다면 새를 표현하는 문자 또는 기호에 조사가 붙고 날다라는 동사를 주어 뒤어 붙여서 사용한다면,
중국어식 표현한다면 난다라는 동사를 먼저 하고 새라는 주어가 뒤어 오는 어순체계로 표현할 것이다.  초기의 글은 사람의 보편적인 상상력에서 생기므로 특정사물을 지칭하는 글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졌을 것이다.  한자 상형문자의 새와 이집트 피라미트 속에서 발견된 문자상의 새는 비슷하다 물론 이집트에서 문자상에 발견된 새가 새를 표한한 말인지는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새 그림이 새를 표현하는 문자라 할지라도 우리(만일 우리도 중국처럼 상형문자에서 출발한 경우로 가정한다면)는 "새"로 읽을 것이고, 중국에선 "조"(우리네 발음이 "조"인데 중국에선 "지오"라고 할지도 모름 중국말을 잘 몰러서)로 읽을 것이다.  아까 "조"에 대한 표현처럼 "날다"라는 표현을 "비어"라고 가정할 경우 우리글의 이름 값과 어순을 사용한 우리 민족의 경우에는 "새가 난다"라고 표현할 것이고, 한문을 사용하는 공동체에서는 "비어 조오"라고 할 것이다.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기호인 문자는 어순의 체계가 다른 집단과 공유할 수도 있는데 이는 보편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한 기호이기 때문에 서로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기초적인 문자체계랄 수 있는 표의문자인 한자(지금의 한자가 기초적인 언어라고 하는 것은 아니며 언어의 세대분류상 한자의 경우 3단계와 최상단계인 4단계 중간단계로 분류하고 있음. 영어와 한글은 4단계라고 함. 그러나 한글학자는 4단계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 분류하는 것이며 우리말은 영어보다 상위단계인 5단계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 이유는 기억나지 않음)의 경우를 먼저 살펴본다면 중국의 한자는 은허의 갑골문이나 토기에 나타난 문자(기호)등 상형문자에서 진시황이 글자체계를 통일한 전서(소전), 한대에 정립된 예서체(조전비, 예기비-맞나), 그리고 해서(구성궁에천명), 행서(난정서), 초서 현대의 간자체 등 발전과정(글자의 변형과정과 글자가 가지는 의미 등)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림(상형)에서 문자로 여러 단계를 거쳐가며 발전하는 과정들을 볼 수 있으나 어순은 바뀌지 않았다. 글이란 아까 말했듯이 공간적인 시간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런 특별한 제약(글이 예술일 수 있는 상황도 있으므로 특정한 제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극복할 필요성이 없다면 글은 필요성이 없고 말(언어)의 발전과정 중에 특정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말과 글에 대하여도 한 번 살펴보자. 우리말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삼국유사랄 수 있다. 어떤 분들이 애기하는 특정문헌에 대하여는 내가 설명하는 과정들을 잘 살펴 본다면 그 문헌들이 잘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우리 말은 기록들을 한자로 적든 지금의 훈민정음으로 적든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어순에 따라 비슷한 소리 값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위에 설명해 두었었다.  역사나 일상을 기록하거나 먼거리에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할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보았듯이 한자을 빌어 사용하였고 어순도 한자의 어순과 같이 사용하였다. 이른바 지배계층인 식자들은 
말과 글을 다르게 사용했었다고 할 수 잇다. 우리가 지금 방영되고 있는 "선덕여왕"에서 보는 대화들, "주몽"에서 사용하는 대화들은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그 시대를 타임머신 타고 갈 지라도 선덕여왕과 김유신 그리고 주몽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한글에 약간 서툰 일본인이 우리들의 대화를 끼인 정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 말이 사용되어진 흔적이 삼국유사에 들어간 향가에 볼 수 있다. 다음 어떤 분이 게시한 서동요와 처용가이다.
원문은 삼국유사에 한자로 기록된 내용이며, 그때의 말이라고 추정한 것이 해독이며 현대역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글로 적은 것이다.

   원문                   해독                    현대역
 
善化公主主隱          善化公主니믄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스지 얼어두고      남 그윽히 얼어 두고


薯童房乙                   맛둥바알                    맛둥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바매 몰 안고가다        밤 몰래 안고 가다.


주어는 한자로 적고 조사도 한자를 적었다.
어떤 부분은 뜻(他, 夜 등)으로 적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소리 값(卯)을 한자로 적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순은 지금과 같지 않는가.  왜 삼국유사 전편에 적혀 있는 한자로 된 다른 기록처럼 그렇게 적지 않았는지 곰곰히 생각하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노래를 한자의 어순에 맞게 한자로 표현해 버리면 노래가 안된다.
적어도 노래가사에 맞게 적고자 했을 것이다.
어떤 분이 새우깡 노래를 이렇게 적어 포스팅을 했습니다.
 

塞友康 (새우강)


멀리에 있는 벗의 편안함을 바라며.....


遜理仮寥 損耳佳 塞友强愛 飡罹價料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강애 손이가요


(겸손을 다스려 거짓함을 자제하니 아름다운 것만 가려서 듣도다..

멀리에 있는 벗을 변함없이 사랑하니..

값진것을 얻을때도 벗에게 주고 싶다.)


阿李遜 蘖慇遜 自求滿 孫利加

아이손 얼은손 자구만 손이가


(언덕에 오얏나무 변함 없으니 자신의 처지만을 한탄하지말고

스스로 만족함을 깨우쳐 후손에게 이로움을 주리오.. )


語對書娜 塞友康 焉災遯止 塞友康

어대서나 새우강 언재둔지 새우강


(물음과 답을 아름다운 글로 멀리있는 벗의 편안함을 바라니.....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나 어찌 그대에게 재앙이 오리오!?)


雨罹逗罹 櫛居要 農心塞友康

우리두리 즐거요 농심새우강


(비가와 근심이 머무른다 하여도 삶이란 다스림이 중요한것이니..

농부의 마음으로 멀리 있는 벗의 편안함을 바라도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적을 때 어떤 문헌들, 떠도는 이야기들, 자기가 수집할 수 있는 최대한을 남기려 할 것이다.
그리고 향가(노래)는 원문에 충실하게 적을려고 이렇게 노력한 것을 보면서 그 시대에 있는 우리 글을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지금의 한글과 같은 문자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어렵게 향가를 적었을 리 없을 것이다.
아래에 실려진 처용가와 같이 적혀야 맞다.  적어도 한자와 같이 훈민정음의 본디 글이 어떤 섬돌조각 기와쪼가리 아님 토기 등에 남아 있어야 한다.  어디 있는가

 

 

한글번역

서울 밝은 달에
밤 늦도록 놀며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었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고구려 유리왕이 서기전 17년(대충 그지음으로 이해하면 되겠음)에 지었다는 황조가, 그리고 구지왕 설화가 있는 구지가 이런 내용들이 전부 한문으로 된 시가가 아니다. 우리 말로 된 시가를 한역하여 적었을 뿐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다. 
청산별곡은 거의 완전하게 만든 당시의 시가처럼 전해지지만 악장가사에 기록되기 전에는 어떤 기록들이 없다.


어느날 갑자기 이삼천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도 않다가 거의 비슷한 문자가 생겼다면 이해가 될 까?
사용례가 오히려 남아 있지 않고 글을 구성하는 자음, 모음만이 남아 있다. 
상형문자의 경우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 불구하고 보편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서 창조되는 것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도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표음문자에서 그럴수 없는 것이다. 세계에 유통되는 많은 표음문자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문자도 없다. 만일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용례가 없으니 같은 글인지 다른 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같은 음값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자란 간단해지고 신속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발전한다고 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사용된 순음들이 천년을 사용하고 없어졌는데 이는 발음상의 편의 때문일 것이다. 창제 당시에는 왜 순음이 꼭 필요했을까 그것은 한자의 어려운 발음들을 염두에 두고 그 발음들을 다 적어 보고자 하는 노력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도 한글은 끊임없이 변천하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발전은 창제 당시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들을 생성하게 되었고, 운송수단의 발전과 함께 외래어들이 한글의 일부를 대체되기도 하고, 컴문화에 힘입어 새로운 신조어의 탄생, 메스컴 전성시대에 생긴 비속어 등 수많은 단어가 새로 생기고 발음에 따라 기존의 단어의 표기방법이 변하고 있다. 어려운 발음들은 편하게 발음하고 표기할 수 있도록 변하게 되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말들이 많다. 어떤 분들은 모방이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어려운 한자어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모방이라고 가정하여도 백성을 깨우치고자 하는 위민정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며, 한자어를 표현하기 위해서 창제하였다고 하여도 문자를 새로 만든 큰 뜻이 있다.
그러나 아니다 모방이라고 하는 말은 유사한 기록들이 발견되지 않는 한 모방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인 편린이라도 남아 이를 규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스스로 무신 대제국 운운하면서 견강부회해서는 되겠는가. 역사는 사실이고 과학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인근 대국인 중국의 변방에 작은 나라로 있었지만 중국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라였다.
지금 우리나라와 중국관계, 우리나라와 미국관계를 사대관계에 있다고 하면 누구나 정색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가고 또다른 세대가 올 경우 이 상황을 사대관계에 있었다고 이야기 안하란 법이 없다. 그때 상황은 그때의 상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역사도 많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골랑 200년 남짓한 미국도 미국의 문화들의 특이점을 발견하여 이를 수츨하고 있지 않는가. 세계인들이 생각하고 가치있게 생각하는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오랜 역사, 찬란한 문화유산 이런 문화는 아니다. 왜 지들이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지들은 이집트나 인도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남의 문화재 도둑질하여 지들 것처럼 전시하고도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우리가 보면 "나는 도둑놈이다"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들은 지들 나라가 부강하여 남 문화재 뺏을 수도 있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사실적으로 고증된 거 말고 억측하거나 견강부회하면 사실도 거짓인 것처럼 의심받게 될 것이다.

어려운 한자를 표기하기 위하여 창제되었다고 하는 말도 이해가 안된다. 훈민정음 서문에 그런 말이 없다. 아까 말했지만 어려운 한자발음을 염두에 두어 순음을 넣지 않았겠나는 짐작이지만 글을 만드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창제당시 유통되는 수많은 말들을 기록하지도 못하는 말을 창제했다면 뭔가 부족한 글이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한자가 우리글에 풍부한 어휘력과 다양한 발음들을 담을 수 있도록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한자와 한자로 이루어진 문화 그리고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중국문화에 대하여 좋은 인상이 있다. 그리고 한자는 정말 훌륭한 문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한글이 가지는 실용성이나 편리성을 자기고 있지 않다.  한자를 사용하는 식자계층은 굳이 한자와 다른 글을 만들어 익혀 한자에 토나 발음기호를 달지 않았을 것이다 식자들의 입장에서는 훈민정음보다 한자가 익히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지식을 얻는 책도 벼슬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교과서도, 벼슬하면서 작성하는 공문서도 다 한자로 작성되는데 그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삼국이 지나고 고려가 지나고 근 천오백년이 더 되는 시간동안 한 번도 그럴 생각을 못해 봤겠는가.

이야기 하면서 많이 돌아갔다. 문자가 필요했던 지배계층이나 기록이 필요했던 민초들은 인근에 나름대로 한자들을 차용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통용하는 일이 쉬운 일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특별히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고 문화를 같이 공유했을 지도 모르고 어떻게 보면 말의 체계는 달라도 문자를 같이 공유하고 같이 발전시켰을 지도 모르는 일인데 인근 문자를 빌어 기록문화는 같이 했는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당시는 죽간이나 나무껍질 토기 돌에 글을 적었기에 많은 글을 적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포스팅 정도면 죽간으로 얼마만한 분량인가 짐작해 보자 이 하찮은 포스팅을 가지고 일삼아 하고 있지만 이를 죽간에 새긴다면 그 일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나 노력이 걸릴까 그때 당시의 기록은 웬만한 필요성이 아니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종이의 대량생산체계가 갖추어진 현대에 까지 민초들에겐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훈민정음에 서문에 실린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그렇다 지배계층과 민초들이 사용하는 말이 중국과 달랐다.
그리하여 "문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아서"   문자(글)로서는 서로 소통이 안된다. 식자계층인 지배계층은 문자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민초들과 식자간에는 문자(글)로서는 소통이 어렵웠다.  임금이 국민들에게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공고를 하는데 정작 투표할 민초들은 무신 말인지 모른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우리글 창제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쉽게 익혀 편안하게 사용하라"하였는데 보급이 쉽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쉽게 익혀 편안하게 사용할 민초들은 기록문화를 만드는 주체가 아닌 까닭이었다. 기록문화의 주체들은 그들의 문자인 한자가 있었기에 오랬동안 일부 계층에만 사용되는 문자로 남았다가 민초들의 의식개혁과 지배계층의 실용정신에 힘입어 확대 보급이 가능했었다.

우리의 언어체계가 다른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언어와 비교하여 크게 다른 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자는 다르다. 24자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고, 특히나 휴대폰 10개키로도 구현이 가능한 합리적인 문자이다. 
세종대왕께서 창제의 동기와 창제의 정신을 잘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자기의 애틋한 소망을 담아 민초들에게 알리고 있다.  만일 글 자체가 현대 생활에서 적합하지 않다면 중국처첨 간체 만들고,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둥 난리가 났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글(우리 역사가)이 오래되었다고 자랑할 필요는 없다. 글 자체가 가지는 우수성을 발전시키고 다듬는 일이 창제정신에 나타난 아름다운 정신을 기리는 일일 것이다.

긴 글을 쓰면서 죄스럽게도 한글 맞춤법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까 조심스럽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쓰다보니 두서도 없다.

한글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와 분명 관련이 있다. 우리 민족이 아니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면 순식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룬 수메르의 설형문자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세계가 한글을 주목한다고 메스컴에서 떠들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자를 수출하려 한다면 정확하지 않는 억측보다 과학과 실증 사실적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 하여야 한다. 위에도 이야기 했지만 제발 지금 알려진 사실보다 더 좋은 역사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by 추종자똘만이 | 2009/10/07 16:52 | 주장과 변명 | 트랙백 | 덧글(0)

자연은 자연스럽게 담고 다음 사람을 위하여 남겨 둡시다.

유명한 디지탈사진사이트가 있다.
그 사이트에 회원으로 있기에
3월 14일 구례 산동면 산수유 촬영을 하고 다음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촬영을 하였는지 구경삼아 사이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어느 누가 포스팅한 사진과 내 사진과 너무 같았다.
그 분의 사진에는 작년에 달린 열매가 달린 채 있었고 내 사진은 열매가 떨어진 사진이었다.
분석을 해 본 결과 같은 피사체로 확신했다.
다만 내 사진은 상류쪽에서 촬영하였고, 그 분은 하류쪽에서 촬영하고 좌우를 바꾼 사진이었다.
어느 누가 사진 촬영을 하고 열매를 따 버렸던 것이다.
물론 열매가 없어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가지였기에 나 말고도 여러분들이 그 가지를 찍었었다.
위 사이트에 포스팅을 하신 분이 열매를 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열매를 따 버린 넘은 양심이 있다면 부끄러워서 포스팅도 않을 것이고 그 사진을 내 놓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아 왔다.
사진 촬영을 위하여 또는 촬영후 남이 똑 같은 사진을 촬영을 할 수 없도록 훼손하는 것이다.

거제 여차 주변에 대소병도가 보이는 좋은 촬영포인트가 있었다.
그 장소는 높은 바위 위에 소나무 가지들이 늘어진 사이로 대소병도를 넣어 촬영이 가능한 장소였다.
언제 누가 포인트 앞쪽에 있는 소나무를 모조리 잘라 버렸다. 
그 장소는 사진하는 사람외는 아무도 안오는 장소기에 틀림없이 사진하는 사람이 훼손하였다.
높은 바위 위에 소나무의 성장속도는 느려
아마도 내 평생에 그 같은 사진은 다시 촬영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리산 모처에 단풍나무 가지가 아래로 늘어진 작은 폭포가 있었다.
단풍철이 되어 단풍나무 가지에 광선이 들면 좋은 포인트가 되었지만
이젠 아무도 이 작은 폭포를 찾지 않는다.
누가 늘어진 단풍나무 가지를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뱀사꼴과 달궁계곡은
아마도 올해도 철쭉이 기가 막히게 필 것이다.
큰 수해가 없었던 기간이 2~3년 되었기에 해마다 꽃이 더 좋아진다고 봐야 한다.
뱀사골과 달궁의 주요 포인트의 꽃도 훼손에서 비껴 갈 수 없었다.
어제 촬영하고 다음 날의 광선상태가 더 좋아서 가 보면 하루만에 꽃이 다 떨어져 있다.

오늘 내가 찍은 사진이 제일 좋는 사진이 아니기에
보다 좋은 상태에서 촬영이 가능하게 남겨 두어야 한다.
나무는 자람에 따라 좋은 사진감이 만들어 지기도 하고 점차 사진감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사진감을 만들기 위하여 가지를 잘라 사진감을 다듬는 것도 자연을 훼손하는 나쁜 찍사의 나쁜 행동일 뿐이다.
좋은 사진을 남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은 자연 속에 자연답게 있도록 남겨 두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자기가 만족일 수 밖에 없고 제 생각이 대중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자신만의 색깔을 위하여 자연을 훼손하여서는 안된다.

거제도의 경우처럼 분명 누군가 내가 촬영한 사진보다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지만
이제는 내 평생에는 다시는 그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가진 사진을 찍으려고 그 장소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두고두고 나를 비난할 것임을 알야야 한다.



by 추종자똘만이 | 2009/03/23 18:05 | 빛과 감성으로.... | 트랙백 | 덧글(0)

반야봉에서의 대박치기

평가(1. 22)도 끝내고 정말 홀가분한 설 연휴(1. 24~27)도 지나고
드디어 직원인사(1. 30)  
본인은 유임     어떻게 보면 좋고 어떻게 보면 섭섭한 인사
00과에 가고 싶었는데 좌절
빨 아저씨가 반야봉에 가잰다.
콧바람이 절루 난다.
근데  지가 힘이나 쓰면서 버너, 식량은 나보고 지란다.
반야봉은 멀어서 그렇지 그리 험하지 않으니 짐도 겁이 안나지만
그래도 내가 지 셀파냐 싶다.  지는 카메라도 가볍고 텐트 해봤자 2키로 내외인데
식량하고 버너 다지면 좀 무겁냐고
심원쪽이 얼었다는 소식에 구례로 돌아 시암재까지만 가자고 하고는 성삼재까지 무사히 올라
거기서 광주사는 이**과 김**을 만나
그래 내가 니들 셀파다
반야봉을 오를 때는 일행에 떨어져서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빨아저씨는 나를 셀파 정도로 알고 있는 듯 했다.
**사진가 창립후 그 협회에서 젊은 사람들이 제자 삼아 달라고 하더라고
그들이 짐만 지게 해달라더라고 이야기 하는 폼이 정말 이제 이 셀파 짓도 끝날때가 되었구나 싶다.
오늘 같은 짐이면 나 혼자도 개길 수 있다
그래 기름 값만 아니면 벌써 졸업했을 거다.
어쨌거나  여명이 밝아 올 지음
그 넘의 이모와 김모 의지와 상관없이 국물 한 번 끓어 먹인다고 짐 다 풀고 있는 상황에
촬영시간이 다 되어 국물도 못 끊이고 다시 짐을 싸고 있는 상황에 노출계 달란다.
그래 포인트 이동해서 주면 안되나 했더니 그냥 달랜다.
다시 짐을 풀어 노출계를 주고 다시 촬영할 준비를 하려니 마음이 많이 힘들다.
전원만 켜 달래던 빨아저씨가 노출계를 두고 무신 노출계가 이렇노 하고 성가시게 한다
나도 촬영을 할려고 바쁜데 그리고 나도 큰 노출계에 익숙하지 않던 터러 헤메고 있는데
결론으로 말하면 지도 슬라이드 촬영 빵치고 내 슬라이드도 빵치고 했다.
지 말처럼 변덕을 지면 지면 지만 말아 먹어야지 나까지도 사진 못하게 *빨
그나마 디지탈이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다.

by 추종자똘만이 | 2009/02/02 11:20 | 빛과 감성으로.... | 트랙백 | 덧글(0)

토종감의 종류

내가 어릴때 고향마을 주변에 많이 있던 토종감의 종류를 정리해 본다
세월이 이만큼 지나고, 감에 대하여도 단감과 홍시감으로 구분하여 더이상 변별의 필요성이 없어지니 자연 감이름도 잊어먹게 되어 더 잊기 전에 정리해 두려한다
무신 감의 학술적인 분류가 아닌 만큼 그냥 편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순전히 우리 고향마을(진주)에서 부르는 감의 종류이니까 시비를 걸지 마세요

참반시
홍시를 해 먹는 감 중에서 최상의 감이다. 뒤에 소개하는 개반시의 크기보다 1.2~1.5배는 크고 납작(개반시보다 약간 두툼한 편)한 감이며 껍질이 두텁지만 익었을 경우 과육이 진홍색으로 홍시가 되면 단맛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을에 차곡차곡 광속에 있는 옹기안에 두었다고 겨울 한 밤에 한개씩 꺼내 먹는다. 떡을 찍어 먹기도 했다. 홍시 중에 단연 으뜸이다. 홍시일때 대봉감이 조금 연한 맛이 있고 퍼지지만 참반시는 조금 단단하고 찰진면이 있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나무가지에 비하여 굵은 감이 열리므로 나무가지가 수양버들처럼 쭉 늘어져 열린다.

개반시
참반시보다 맛도 크기도 떨어진다. 청도반시를 개반시라고 하면 청도사람에게 맞아 죽는다. 그래도 청도반시와 거의 비슷하다 내심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단맛도 떨어지고 색깔도 참반시에 비하여 많이 분홍색에 가깝다. 저장성은 모르겠고 좌우지간 작은 집 울타리에 심어 두었기에 참반시보다 먼저 익는 성질이 있어 많이 애용하였다.

월해감 월애감
대봉감에 비하여 크기가조금 작다 모양은 대봉, 월해, 고동시(고종시)가 약간 길쭉한 듯한 형태가 같다 크기면에서 대봉감이 월애감의 1.5~2배정도 크고 고동시는 월애감의6~70%정도 된다. 월애감을 저장해서 먹어보지는 많았다. 늦여름부터 익기 시작하므로 배고픈 시절 내 식량이 되었다. 가을되면 거의 나무위에 살았다. 학교 갔다 오면 월애감 2~3개정도는 먹어주어야 했다. 감의 품질은 단연 참반시 월해감 물감 고동시 순서다 우리동네는 아쉽게도 어릴 때 대봉감이 없었다. 월애감 곶감은 곶감이 크고 아주 달다 건조문제가 따르므로 풋감일 때 수확하여 깍아야 한다.

물감
월해감보다 약간 적다 월해감이 사각뿔현이면 원형뿔 형태에서 뿔부분이 원형으로 둥그스럽하다. 함안 파수 곶감은 물감으로 보였다. 과육이 부드럽다 과육의 단단하기도 치면 고동시가 제일 여물고 월해감 물감순이다. 물감나무가 크게 자란 거는 보지 못한거 같다.

고동시 고종시
산청의 곶감은 고동시로 깎는다. 그의 산에 나는 돌감과 유사하다. 돌감보다 약간 크지만 과육이 단단하고 서리가 내리고 나면 단맛이 굉장하다 나무의 성장도 빨라 대게 큰나무의 경우 고동시나무이다

만화감 만회감
지름이 2㎝ 정도인 둥근 형태로 작은 감이다. 과육이 단단하고 여간 붉은 감도 턺은 맛이 난다. 아예 무른 상태가 되어야 단맛이 난다. 우리동네 면장네만 유독 만화감이 있었다. 만화감도 나무가지에 비하여 많은 수량이 달리므로 나무가지가 축 늘어진다.

단감
요즘 보이는 단감은 교잡종이고 예전에 대봉감처럼 큰 단감이 있었다. 대봉감에 비하여 과실의 끝단이 둥근 편이다. 요즘처럼 달지는 않지만 그래도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나무마다 단 맛이 달랐기에 확실하게 단맛나는 나무는 단맛들기가 무섭게 꼬마들의 표적이 되었다. 참고로 요즘의 단감은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으로 경남 진영지역에 처음 심기 시작하여 전국으로 재배면적이 늘어난 품종이며, 대게 일본계 품종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박도감
박도감은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 동네도 우리 집에만 있다가 대가 자라 나와서 고사해 버렸다. 감의 크기는 대봉감보다 약간 작지만 참반시의 형태에서 더 두떱다. 감의 크기가 크고 단단한 만큼 곶감용으로 제일이다. 실제 곶감용으로 제일인 감이 참반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반시는 홍시가 되었을 때 맛이 일품인 관계로 아무도 곶감 깍는 사람이 없었다. 박도감은 약간 사각형에 이형인 열매도 있어 감 수확할 때 이형으로 생긴 감을 들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고동시처럼 생긴 단감
이 넘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우리밭 어귀에 조그만 나무에 고동시처럼 생긴 단감이 있었다. 이 넘도 정말 골라 먹는 맛이 있었다. 과육이 단단한 편이므로 아마 곶감용으로 하여도 되었지만 곶감으로 깍은 기억은 없다. 이 넘도 죽은는지 살았는지 그넘도 돈도 안되는 두충나무 땜세

대봉감
홍시로 먹는 큰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넘은 크기도 크지만 열기도 무지하게 연다. 거짓말 좀 보테서 애 머리만하다.
이번 가을 추수가면 사진을 좀 찍어서 올리려 한다. 시간이 잘 날지 모르지만
언제

by 추종자똘만이 | 2008/10/07 13:16 | 주장과 변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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